이 책을 산 것은 몇 주 전의 일이었다. 그 후 몇 번 훑어본 뒤로 이 책은 키보드 옆에 한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책장에 꽂아두지 않고 굳이 눈에 잘 띄도록 키보드 옆에 둔 것은 이 책을 빠른 시일 내에 정독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는데, 어젯밤 새벽에 '시리아나'라는 영화를 본 것을 계기로 다시 이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석유를 둘러싼 미국과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영화를 보고나니 문득 이 르몽드 세계사에서 다루던 중동의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몸에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다리 근육이 이상하게 저려왔고 그래서 그런지 집중도 잘 되지 않았다. 아마 원인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읽는 이러한 내용이 실은 세계사의 부정적인 점만 강조한 지엽적인 내용에 불과할지도 모르며,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그런 부정적인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으므로 이 책의 시각이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가정해도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오히려 균형을 이루는 면이 있을 것이다---나로서는 단순히 읽고마는 수준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몸과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다.
세계적 이슈와 쟁점들에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고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린다. 심지어 국내 정치나 이슈도 그럴진대 그 무대를 세계로 옮겨가면 그 거리감은 도저히 느낄 수가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자기 몸하나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는 노숙자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나 지역차와 세대차로 구별되는 정치적 색에 대해 TV와 신문에서 들은 바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참으로 순진하여 안타까워보이는 것이다. 자신은 무언가를 알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이라는 것이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인데다가 해결책이 없는, 쉽게 얘기해 하나마나한 소리라는 것에 답답함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그런 한계를 다시금 드러낸 셈이다.
나에게 이 세계사책은 마치 과학책의 그것처럼 단순 암기식의 지식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끝없이 그런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심지어 얼마 뒤면 그런 사실이 세상에 아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굶어죽고 내전으로 죽고 유전자변형 음식과 물부족의 위협에 시달리며 빈부격차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선과 악의 대결, 이 다소 식상한 주제가 결말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이게 정말 이탈로 칼비노의 세계적 명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재빠르게 읽다가 내가 놓친 부분, 번역상에서 날아간 언어 자체의 묘미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책이 출판된 것은 1952년이니, 선과 악이라는 대결적 주제를 지금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거대한 전시회장의 한 남자. 그는 그 값비싼 예술품이 아니라 그 전시장의 관리인을 보기 위해 전시회에 갔다. 그에게 그녀는 그 전시장의 모든 그림들보다 더 의미있는 예술품이었다.
그 그림을 보자. 두 연인이 비슷한 옷을 입은 채 서로 기대고 있다.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다. 창문은 활짝 열려있고, 커튼이 휘날릴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다. 얼핏보면 평온해 보이는 이 그림에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놀랐을 것이다. 창문은 너무 커 공허해보였고 바람은 너무 거세게 불어 불안해보였다. 이게 우리 행복의 깊이를 표현한 그림이란 말인가? "그 그림은 나를 완전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크나큰 의혹을 품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29쪽)

여기 또 다른 그림이 있다. 남자는 선약도 취소한 채 한 여자를 기다리는 중이다. 남자를 향해 걸어가는 그 여자의 표정은 도도하고 큰 귀걸이를 했으며 자신의 몸보다도 더 큰 과장된 옷을 걸치고 있다. 그녀는 화려한 불빛을 뒤로한 채 호텔로 보이는 로비의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려 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그녀가 다가오는 걸 보면서" (39쪽) 그런데 문제는 남자의 표현과는 달리 그녀가 그다지 우아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치장한 도도한 표정의 여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자. 그에게서 돈으로 여자의 환심을 사려했던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게 된다. 뒤이어 이어지는, 우스갯소리들을 적어놓은 수첩이 있기에 안심이 되며 스스로에게 칭찬까지 하고 싶어진다는 남자의 말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그의 방식에 단순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난 이 책의 지은이가 책의 모든 문장에서 현대인들이 지닌 허례허식과 불안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무척 놀랐다. 난 장 자끄 상뻬의 그림에 따스함이 어려있다는 식의 표현을 항상 보아왔던 것이다. 특히 이 유명한 "속 깊은 이성 친구"에 대한 세간의 평은 더욱 그러했었다. 그러나 난 이 책의 글에서 사람들의 허황된 꿈과 불안심리를 발견하고 이 책의 그림에서 일부러 의도된 화려한 색상을 발견한다. 그의 그림은, 그 내용 자체만 두고 보면 그다지 따뜻한 그림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동안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의 그림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간 사람들의 평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세간이 평하는 그 '따스함'이란, 자기 방어에 바쁘며 행복의 의미를 모른 채 파편화된 일상을 사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그가 비판하거나 힐난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의 불안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불안함을 감춘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관망의 시선'이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인간이 왜 실수를 하는가에 대한 이 책은 인간이 실수를 하는 원인의 상당수를 인지적 측면에서 찾고 있다. 즉 시야가 명확히 볼 수 있는 각도의 한계성, 기억력의 한계성,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제약, 색과 향, 분위기 등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의 혼동, 여러가지 작업을 한번에 할 때 발생하는 주의력 분산 등이 그것이다. 사실 이건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인간이 가진 인지능력의 한계는 꽤나 오래전부터 알려져왔던 사실이고, 그런 인지 한계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한 판단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새로울 것도 없이, 이 책은 그런 인간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실수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여러 제약때문에 잠깐 본 것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게 확실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거 일지도 몰라'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판단의 차이는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이지, 그걸 가지고 인간이 실수를 하는 원인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한 가장 큰 실수는 이 책이 우리의 실수에 대해 인문과학적인 접근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인문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이자 심리적(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인 차원이었다. 하지만 난 내가 제목만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실수를 했다고 말해선 안될 것이다. 제목을 보고 책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행위이며, 이 책은 그런 독자의 사고방식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책 제목을 지었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데 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한다면 발에 걸려 넘어진 후 '아 내가 실수를 했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발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독자를 기만하는 책이 줄어들 것이므로.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는 객곽적인 관점에서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난 이 책을 다소 빠른 속도로 읽었기 때문에 뉘앙스를 놓쳤을 수도 있고 중요 포인트를 미쳐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실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100미터 단거리 주자에게 마라톤을 뛰라고 하면 어떤 실수가 나올지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100미터 주자에게 장거리를 뛰는 것이 우리가 실수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처럼 병적인 수준을 제외하면) 비슷한 수준의 인지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 동일한 인지능력을 가지고 다양한 판단을 한다. 이 책은 아주 일반적인 판단을 하는 대다수를 분석한 책이며, 결국 그 일반적인 사람들(우리)이 왜 실수를 하는지를 말하는 책이다. 결국 이 책도 대중적인 인간에 대해 대중적 분석을 하는 평범한 책 중의 하나이지만 이 책이 전 세계 인구의 절대수를 차지하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판매전략, 교육전략, 노동전략을 펼칠 때 유용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대중을 자신들이 조종하고 이끌고 선동할 수 있으며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고, 또는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 될 것이다.
책 속의 두 주인공 '나'와 '호자'는 닮은 듯 서로 다르며, 서로에 대해 혐오하면서도 속으로는 알 수 없는 충동적 호기심을 느끼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에게 느끼는 모습이 대입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되지만, 난 사실상 호자가 '나'라는 주인공에 대해 혼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보아야할 그런 질투와 회한의 감정을 동서양의 대결이나 융합이라는 큰 틀로 연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호자라는 사람에게 친숙함과 동질감을 느꼈던 건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을 바라보며 느끼는 질투나 질시때문이 아니라, 태생적 차이로 인해 자신의 노력으로도 가질 수 없었던 서양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개인적인' 질투심과 공명심을, 그리고 자기에 대한 탐구 끝에 찾아온 극심한 외로움과 혼란을 호자가 잘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호자는 세속적 야망에 불타지만 노예인 '나'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으며, '나'가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낀다. 그런 호자의 분노는 '나'와 '호자'의 유사성에 대한 의혹(자아탐구)으로 이어지는데, 호자의 그런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 대한 존경과 야릇한 연정으로 뒤섞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애증이라는, 자신도 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그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호자'는 '나'와 헤어진지 오랜 시간이 지나 곧 일흔살을 앞에 두었음에도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다. 그가 눈으로 보았던 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상상하고자 하며, 그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서 알아본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찾고자 했던 것이, 그리워했던 것이 '나'인지, 회의로 가득찬 '호자'인지, 마냥 흘려보낸 젊음인지, 어느 날 의자에 누워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던 푸른 하늘과 구름인지 알지 못한다. 젊음, 야망, 사랑,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당혹스러움을 마주하게 된다. 지식과 출세에만 몰두하던 '호자'가 자신을 내면의 고민으로 이끈 '나'를 잊지 못하듯,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 그 사람을 결코 잊지 못한다.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혼란과 희열과 외로움은---어쩌면 이 책의 표지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듯이---뒤틀린 공간 속에서 펜로즈의 무한계단 위를 움직인다. 그것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하얀 성 아래에서 홀로 우두커니 그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몇 번을 읽었을까? 그의 글에서 동물과 분리되지 않은 삶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동물과 분리되지 않은 삶, 그것은 그의 글과 분리되지 않는 삶과도 같다.
"사람들은(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믿지 않는 사람들만이) 어느 날 그들이 단순한 단역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연기하게 되어있는 연극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알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필이면 다른 역할이 아닌 그러한 역이 맡겨진 것에 대해 놀라 역할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성격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동물들은 그 연극에서 솔직하게 연기하며, 질문을 던지는 법 없이 그들 앞을 내다본다." 46-47쪽
오륜서. 일본 희대의 검술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쓴 책이다. 검의 도(道)에 대해 쓴 책이라 검술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면 읽어볼 일이 없을 듯 싶으나, 현대에 와서 검법을 경영이나 자기계발과 연관지어 풀이해서인지 꽤 관심있게 읽는 분들이 많은 듯 싶다. 이런 점은 현대인이 고전을 왜 읽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조금 답을 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도(두 개의 검)류를 근간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그리고 글만으로 기술을 배운다는 것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 개의 도를 사용하는 나에게 기술적으로는 크게 와닿는 부분은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일격에 친다'---에이가 나오키가 주인공으로 나온 NHK의 검도 다큐멘터리 제목은 이것을 따 만들어진 듯 싶다---라던지, 선의 선과 후의 선과 비슷한 맥락을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몸과 마음가짐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부분 등 정신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할 땐 절로 마음에서 흥취가 돌았다.
미아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내용 중 핵심은 아마 이것이 아닐까 싶다. "검술의 진정한 도는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요 이것을 빼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100쪽)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검술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오랫동안 했던 무사에게 어찌보면 당연한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긴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관점에도 많은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다치(큰칼)가 상대에게 닿을 때에는 상대의 다치 또한 나에게 닿는 것이다. 상대를 치려고 하면 내 몸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127쪽)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현대 검도에서도 강조하는 부분인데, 내가 적을 치려고 다가가면 적 역시 나를 칠 수 있는 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의 경구인 "괴물을 쫓는 자는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볼 것이다."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문학을 중심으로 다루는 책은 어떨까? 대중서적을 보았을 때 그들 대부분이 줄거리 요약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고전 및 중세 문학을 다루는 책 중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책은 "세계문학의 천재들"(해럴드 블룸 지음, 손태수 옮김)인데, 책의 제목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작품 위주의 책은 아니다. 또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그 작가와 관련 있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 역사적 배경이야기,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뒤섞여 나오기에 읽기에 쉬운 책이 아닌, 그러니까 다소 식자층을 위한 책이다.
그에 비해 이 책은 그 책 내용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읽기 어려운 것처럼만 느껴지는 고전과 중세 문학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독서법에 대해 쭉 설명한 후 이렇게 쓴다. "이 사내가 무엇 때문에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지 늘 궁금해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작가와 보조를 맞추어 탱고를 출 것인가, 바로 그 차이다." (155쪽)
그리고 무엇보다도---이 책은 재미있다. 이 책의 작가 잭 머니건은 고전이 재미있게 읽히기를 희망했고, 어느 정도 그 일을 해냈다. 줄거리를 요약하고, 배경을 설명하고, 이 글을 쓴 작가의 인생을 나열한 책들(물론 그런 책들도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이 가지지 못한 관점과 재미가 이 책에 담겨있다. 작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 학생들에게 초서의 작품처럼 생소하고 만만치 않은 작품을 읽히고 싶다면, 우선은 학생들이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세 시대 작품이 재미도 있으면서 살짝 도발적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까?"(125쪽) 그리고 작가의 그러한 생각은 이 책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배경이나 문학사상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은 그런 재미를 위해 자신의 글쓰기에 현대적인 감각을 부여했다: "십중팔구 호메로스는 그런 기분이었을 거다. 일종의 이년차 증후군에 걸렸을 거라는 얘기다"(22쪽), "오디세우스의 집을 무슨 남학생 사교클럽처럼 만들어버리던"(23쪽), "마법의 주문을 걸어 사람을 동물로 만든다(그래,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건 술 때문만은 아니다)."(26쪽) 이런 표현들은 확실히 고전에 대한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작가 특유의 그런 장난스러움이 날카롭다는 느낌보다는 놀리거나 비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어 읽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은 면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베르길리우스가 "너희가 정복한 자들을 평화로써 가르치고"라고 한 부분을 독선이라고 일침을 가하는 부분에선 그의 비판적인 시각이 잘 나타난다. 또한 작가 자신의 멋진 표현들도 눈에 띈다: "전설의 섬과 사실의 섬들 주변에서 농락당하다가"(23쪽), "책을 읽는 동안 여러분의 대뇌 속 은막에 필름이 영사되도록 하는게 중요하다"(24쪽).
난 오래 전부터 성서 그 자체에 꽤 관심이 있었는데(서양 문학의 상당수가 크건 작건 구약과 신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완독하지 못했다. 사실 앞으로도 빠른 시일 내에 완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읽을 부분을 추천을 해주는---자세하진 않지만---이 책은 도움이 된다(후에 이스라엘로 불릴 야곱, 사무엘상의 다윗, 열왕기상의 솔로몬, 엘리야와 그리스도의 유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 전도서, 고린도전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성경의 이 부분은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책에 관한 책'은 결국 그 책에 대한 소개서에 불과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책에 관한 책'이 그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결국 그 책을 손으로 잡게 만든다면---게다가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알려준다면---그 또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책과 다른 심리학 책과의 차이점이라면 과학적으로 보이는 실험 결과를, 그것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서 그런 실험을 시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시도는 다소 성공적이어서 그들이 한 심리 실험을 꽤 정당성있게 또 설득력 있도록 보이게 했다. 하지만 몇몇 주장에서는 결론 도출에 다소 문제점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동일한 서평에서 한쪽은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했을 때 사람들은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한 서평자를 더 지적이고 유능하다고 생각했다는 한 실험을 보자. 이 실험까지는 좋은데, 그 실험을 통해 저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더 지적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 결론의 문제점은, 단순히 '부정'과 '긍정'의 차이가 더 지적으로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나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영화평론이나 책서평, 물품의 사용후기를 읽을 때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글들을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그 글들이 판매를 목적으로 한 '출판사 서평'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어주고, 또 단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출판사나 제조사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좋은 말만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균형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부정적 의견 = 지적으로 보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적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 부정적 의견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라거나, 긍정적인 내용인데 작품을 자세히 분석하여 그 작품이 지닌 매력을 잘 이끌어냈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그런 의견에 단순히 지적이거나 지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 (아주 흔한 예시이긴 하지만) 외향성/내향성 테스트가 있다. 이 책은 이런 글을 인용한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대개 두 발을 넓게 벌리고, 몸을 꼿꼿이 세우고, 동작은 크고, 얼굴 표정의 변화가 많으며, 대화 상대와 시선을 자주 마주친다. 반면에 내향적인 사람들은 대개 몸이 구부정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어깨를 움츠리며, 대화 상대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109쪽) 이 글의 문제점은 외향적인 사람들과 내향적인 사람들의 차이점을 잘못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외향과 내향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에 있다. 나 자신만 하더라도 내 기분에 따라,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느냐에 따라,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따라 외향적이고 내향적일 때가 변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난 외향적으로 변하고, 처음보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다소 내향적으로 변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외향적으로 변하고 잘 모르거나 하기 싫은 일일 때는 내향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단순히 외향적인 사람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끌리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끌린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대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그의 의견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끌린다는 그의 주장은 수용하기 어려운데, 사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들에게 큰 흥미를 느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세상의 통념들은 자주 충돌한다"라고 말했던 그였기에 오히려 더 의아스럽게 느껴진다. '안 보면 보고 싶어진다'와 '안 보면 멀어진다', 또 '여럿이 하면 힘이 덜 든다'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통념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그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끌린다'는 자신의 의견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끌린다'는 통념과 충돌시키고 있다.
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불필요할까? 그렇지는 않다. 이 책의 내용이 대중적으로는, 표면적으로는 거의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점이,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점이 그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 학교의 축구부가 경기를 하면---그들의 출신은 사실 축구부의 승패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그들은 단순히 같은 학교라는 이유로 그 축구부가 승리하면 기뻐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는 거의 맞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심리학 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그 다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결속시키기 위해선 그들 사이의 무언가 공통점을 찾아라." 이런 것이 이런 심리학 책이 던져주는 최종적 메시지이다. ‘그들의 출신이 사실 축구부의 승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심리학 책은 그런 점을 ’이용‘하라고 알려준다. 심지어 회사의 팀 내부에 모두가 싫어하는 팀원이 있을 경우 그를 잘 이용하라고까지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싫어하는 팀원은 다른 팀원들을 결속시켜주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한 명의 팀원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심리적 전략은 '대중적'으로,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옳아 보이기 때문이며, 심지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들은 여전히 일부 사람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 된다. 세상의 복잡성을 따져보았을 때, 심리적 테스트들은 결국 아무리 여러 요소를 고려했다 할지라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 실험의 결과 도출이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한 도구적 요소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럴 때 이렇게 반응한다. 그러니 이렇게 행동하라"---이것이 이 책의 금언이다. 이 책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고 그른지, 도덕적으로 바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문가는 그의 전문성 여부와 관계없이 전문가로 불리는 순간 실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문장은 대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 대해 어떤 책은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반면 이런 류의 심리학 책은 "그렇기 때문에 호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문가라는 호칭의 사용을 고려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받는 동시에 이런 류의 책이 지배를 못하는 그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다. 이런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표면적인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는 편이 낫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제목 일부인 "본심"은 심리적 전략으로 사용된 단어인 셈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실질적으로 피상적인 만남이 인간관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은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닌 그 피상적인 관계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닐까, 하는. 바쁘게 움직이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책은 천천히 사는 법이 아니라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법을 알려주는 책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서를 비난하는 것보다는 그 사이에서 삶의 균형을 이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에게 이런 화두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가치를 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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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 국제관계학, 역사학.. 같은 현상을 두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학문입니다. 연구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어떤 관점으로 연구할 것인지에 따라 결론이 다르다 보니, 답이 없이 공허하고 허황된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어떨땐 풀어쓴 여러 이론이나 주장들이 소설책처럼 재밌기도 하다가 또 어떨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연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갑론을박을 거듭해서 계속 연구하다 보면 어떤 패턴을 찾게되고 반복되는 어떤 현상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해결책을 찾아간다는 면에서 조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